
한국에는 왜 ‘인종차별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가
한국은 한국인인 내가 느끼기에도 인종차별이 심하다.
“한국은 미국처럼 흑인을 때리지 않잖아.”
“우리는 백인과 흑인을 법으로 분리한 적도 없다.”
“중국인을 싫어하는 건 인종차별이 아니라 중국이 싫은 거다.”
“조선족은 우리랑 같은 민족인데 그게 어떻게 인종차별이냐.”
나는 오히려 이런 반응 자체가 한국의 인종차별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인종차별이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좁게 사용된다. 피부색이 다른 사람을 폭행하거나, 식당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거나, 미국의 짐 크로 법처럼 제도적으로 사람을 분리해야만 인종차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어떤 국가나 민족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개인의 성격과 지능, 위생 수준, 도덕성, 범죄 가능성까지 한꺼번에 추정하면서도 그것을 차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 대학원 시절에 성균관대 대학원 앞에서 한식 뷔페에서 밥먹을때 우비나 우조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에게 보여준 식당 주인의 태도와 그 식당에 붙어있는 아프리카 난민은 굶고 있다라는 것들이 한국에서 보여주는 일상적 차별을 보여준다 생각한다.
미국의 인종차별과 한국의 인종차별은 같은 모습일 필요가 없다
한국인이 인종차별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사회는 미국이다.
노예제, 흑백분리, KKK, 흑인에 대한 경찰폭력 같은 역사다.
이것은 당연히 인종차별일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역사에서 나타났던 형태만을 인종차별의 표준으로 삼으며 자신의 인종차별을 되돌아보지 못한다.
한국에서는 중국인이나 조선족을 국적과 출신만으로 비하해도,
“같은 황인종인데 어떻게 인종차별이냐.”
라는 말을 한다. 한국 인터넷에서 중국인에 대한 공격은 도를 넘었다.
실제로 내가 본 댓글에서도 바로 이런 논쟁이 등장했다. 특정 국적만 혐오하는 것은 인종차별이 아니라는 주장, 같은 황인종끼리는 인종차별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반응이 나왔다.
물론 엄밀한 사회과학 용어로 들어가면 모든 국적혐오를 racism이라는 단어 하나로 처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종차별, 민족차별, 외국인혐오(xenophobia), 종교차별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일상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그렇게 깔끔하게 분리되는가?
사람의 얼굴과 피부색을 보고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를 추측한다.
국적을 알면 소득수준과 직업을 추측한다.
민족을 알면 범죄율과 위생 수준과 성격을 추측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집단 이미지를 눈앞의 개인에게 적용한다.
여기에는 인종과 민족, 국적, 계급을 한번에 추측한다.
한국의 문제는 인종차별이 미국과 다른 형태라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국적이 계급처럼 작동할 때가 있다
한 가지 사고실험을 해보자.
똑같이 한국어를 못하는 외국인 두 명이 있다.
한 사람은 미국인이고 한 사람은 가난한 개발도상국 출신 이주노동자다.
우리는 정말 두 사람을 똑같이 바라볼까?
같은 동양인이라 해도 일본인 관광객과 동남아시아 출신 공장 노동자가 같은 사회적 이미지를 갖는가?
중국 대기업의 고소득 엔지니어와 조선족 건설노동자가 단순히 ‘중국계’라는 이유로 같은 취급을 받는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차별을 피부색 하나로 설명하는 것도 부족하다.
나는 오히려 이렇게 보는 편이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인종 × 국적 × 소득 × 직업 × 민족적 이미지가 결합된 서열화.
미국에서 race라는 범주가 담당했던 역할 중 일부를 한국에서는 국적과 민족, 경제적 지위가 함께 담당한다.
그래서 백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동일하게 대우받는 것도 아니고, 같은 동아시아인이라고 해서 차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정부를 싫어하는 것과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다르다
중국 이야기를 하면 이 문제가 특히 선명해진다.
중국 정부를 비판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중국 공산당의 정책을 비판할 수도 있고, 중국의 외교정책이나 인권 문제에 강하게 반대할 수도 있다.
일본 정부의 역사인식을 비판할 수도 있다.
특정 이슬람 종교 규범을 비판할 수도 있다.
난민정책에 반대할 수도 있다. 이것은 그 자체로 인종차별이 아니다.
하지만 보통 이렇게 바뀐다.
중국 정부가 싫다. 그래서 중국인이 싫다. 그러므로 처음 보는 중국인을 욕해도 된다.
국가와 개인이 하나로 합쳐진다.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부를 지지하는지 반대하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한국에서 태어날 국가를 선택할 수 없듯이 그 사람 역시 중국에서 태어날 국가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런데 국적 하나만으로 국가 전체의 책임을 한 개인에게 물린다.
나는 이 지점부터 차별이라고 생각한다.
정부와 제도를 비판하는 것과 태어난 곳 때문에 개인을 모욕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럼 좋아하라는 거냐?”
이런 이야기를 하면 거의 반드시 나오는 반응이 있다.
“그래서 중국인을 좋아하라고?”
한 사람이 “그래서 좋아하라고?”라고 하자 다른 사람이 “혐오 말고 할 수 있는 게 좋아하기뿐이냐”고 되물었다.
나는 기가 찼다.
우리는 왜 선택지를 둘밖에 없다고 생각할까?
좋아한다 ↔ 혐오한다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가?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정책에는 반대하면서 개인에게는 아무 감정이 없을 수도 있다.
개인의 행동을 보고 그 개인을 싫어할 수도 있다.
굳이 어느 민족 전체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차별하지 말라는 것은 타인을 사랑하라는 요구가 아니다.
개인을 그 사람이 속한 집단만으로 먼저 재판하지 말아야한다.
그 정도다.
한국에서는 ‘이유가 있는 혐오’가 면죄부가 되기 쉽다
차별을 하는 사람도 보통 자신이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미워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항상 이유가 있다.
범죄율이 높아서.
매너가 나빠서.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잘못해서.
우리나라에서 문제를 일으켜서.
종교가 싫어서.
사회에 부담을 줘서.
모든 혐오에는 본인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다
인종차별주의자가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설명하는 경우는 드물다.
나는 근거 없이 저 인종을 미워한다.
대부분은 자신에게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집단에 관한 통계나 경험을 눈앞의 개인을 판단하는 것은 다르다.
어떤 국가에서 범죄율이 높다고 해서 그 국적의 처음 보는 사람이 범죄자는 아니다.
어떤 관광객 집단의 매너가 나쁘다는 경험이 있다고 해서 다음에 만나는 개인에게 욕설을 할 권리가 생기지 않는다.
국가와 집단을 평가하는 것과 개인을 평가하는 것은 다른 층위의 판단이다.
내가 대구에서 사기를 사기를 당하고 내가 다니던 대학교에서 학생회 비리 고발이후 철처한 아웃사이더 생활을 했는데, 그럼 대구는 사기꾼의 도시인가? 그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그 집단 그 표본에 한정해서만 존재하는 것뿐이다.
한국에서는 물리적 폭력이 없으면 차별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도 외국처럼 길에서 두들겨 패지는 않잖아.
한국에서 자주 보이는 논쟁이다.
물론 물리적 폭력은 언어적 모욕보다 훨씬 심각하다.
차별적 표현과 살인·폭행을 같은 수준에 놓아서는 안 된다.
한국의 높은 치안 수준 역시 분명 장점이다.
그러나:
폭행하지 않는다.
와
차별하지 않는다.
는 전혀 같은 문장이 아니다.
서비스를 다르게 할 수도 있다.
친구나 배우자 후보에서 출신만으로 배제할 수도 있는 것.
그 사람을 인터넷상에서 국적으로 비웃는 그자체가 차별이다.
사람이 알아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 바로 앞에서 모욕할 수도 있다.
차별의 존재 여부를 판단하는 최저선을 “두들겨 맞았는가”에 놓으면 약한 차별이 차별이 차별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외국인들이 겪는 일상적 차별은 은은하게 저열하게 깔려있다.
단일민족이라는 오래된 자기 이미지
한국은 오랫동안 자신을 단일민족 국가라고 설명해왔다.
한국 사회는 그렇게 자신을 상상해왔다는 것이다.
외국인은 사회 구성원의 일상적인 한 범주라기보다 외부에서 잠시 들어오는 존재처럼 여겨졌다.
서유럽이나 미국처럼 대규모 이민이 오래 지속된 것도 아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인종갈등의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
갈등이 적었다는 것이 반드시 관용이 높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른 인종과 민족을 실제 이웃으로 만날 기회 자체가 적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교실의 친구가 되고,
직장의 동료가 되고,
같은 아파트 주민이 되고,
자녀의 배우자가 되는 단계로 들어가면 그때부터 추상적인 외국인 이미지와 현실의 개인이 충돌한다.
거기에 더해서 인종차별에 더해서 아무래도 프로그래머다 보니, 게임쪽을 자주 보는데, 특히 PC에 대한 비이성적 과열이 너무 광적이다.
이번에 인섬니악의 울버린 캐릭터 외모 논쟁부터 시작해서 나쁜 것을 모든게 PC고 그 안에 왜곡과 선동이 엄청나게 많이들어있다.
한국 인터넷에서 PC가 유독 반감을 사는 이유 중 하나는 한국인이 국내에서는 오랫동안 압도적인 민족적 다수자로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수자의 문화는 문화가 아니라 그냥 ‘상식’이나 ‘기본값’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소수자가 기존의 언어나 관습을 바꿔달라고 요구하면, 그것이 차별을 줄이기 위한 요구라기보다 다수자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소수자에게 특혜를 주는 일처럼 받아들여지기 쉽다.
특히 한국은 미국처럼 인종적 소수자와 다수자의 갈등이 오랜 기간 사회정치의 중심에 있었던 사회가 아니다. 그 결과 미국에서 시민권운동과 소수자 정치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PC의 결과만 수입되고, 왜 그런 규범이 생겼는지에 대한 맥락은 충분히 공유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 인터넷에서 PC는 종종 소수자가 다수자와 동등한 위치를 요구하는 규범이라기보다, 소수자가 주류에게 양보를 요구하는 정치운동으로 해석된다.
그러니 소수자가 기존 언어와 관습을 바꿔달라고 요구할 때 그것은 차별의 감소가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새로운 규칙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기 쉽다. 미국에서 시민권운동과 소수자 정치의 긴 역사 끝에 등장한 규범의 결과만 한국으로 수입되면 이러한 감각은 더욱 강해진다.
그래서 한국에서 PC는 종종 소수자가 다수자와 동일한 위치를 요구하는 규범이 아니라, 소수자가 다수자에게 양보를 강요하는 정치운동으로 번역된다.
그렇기때문에 그들의 인권적 저항등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공격적인 성향이 많다. 미국에서는 백인성(whiteness)라고 말하는 개념, 즉 지배적인 집단의 정체성이 너무 일상적이어서 정체성으로 인식되지 않고, 조금이라도 다른 소수자 집단에 대한 것들을 공격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극한 PC가 없다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한국 게임 커뮤니티의 극단적 반 PC 과잉을 보면 특히 그러한 것을 인식하게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 기준에 나쁜것은 PC가 망쳤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우스운 짓인지.
인종차별은 언제나 멀리 있는 악인의 행동처럼 보인다
사람은 자신을 악인으로 생각하기 싫어한다.
그래서 인종차별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언제나 자신보다 훨씬 극단적인 사람을 상상한다.
KKK.
네오나치.
흑인을 폭행하는 사람.
외국인을 식당에서 쫓아내는 사람.
그들과 비교하면 나는 정상적인 사람이다.
그렇다면 내가 중국인을 싸잡아 욕하는 것은 인종차별이 아니다.
조선족을 태생적으로 범죄 위험이 높은 사람처럼 말해도 인종차별이 아니다.
동남아시아 사람을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먼저 추측해도 인종차별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라면 인종차별주의자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 아니라 조금 더 극단적인 다른 사람이다.
그리고 그렇게 정의하면 거의 누구도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없다.
그 어떤것도 폭력이 없으면 인종차별이 되지 않는 것이다.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한국 인터넷에서 만연한 중국인들에 대한 차별과 공격이 역겹다.
착짱죽짱이라면서 착한 짱깨는 죽은 짱깨라고 비하하는 그것이 역겹다.
흑인들에 대한 댓글들도 '그 인종'이라는 식으로 비하하는 글들이 너무 많다.
인도인에 대해서 공격하는 유튜브 댓글도 짜증난다.
하얀 백인에 대해서 선망하면서 그 문화에 대해서 찬양하고 반대로 한국의 국력보다 낮은 백인이 아닌 인종에 보이는 그 공격성이 한국의 적나라함이다.
예멘 난민 500명 들어왔다고 집회하고, 적법한 허가를 내준 이슬람 사원에 반대하는 대구 기독교인들도 역겹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쫓아내라는 시위를 하고.
한국에는 인종차별이 없다고 하면서 후드식 밈이니, 그 인종이니 비하나 해대는 한국 인터넷을 보다보면 나도 이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게 한없이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