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업계의 영웅주의에서 벗어나기
뛰어난 사람을 인정하는 일과, 그 사람에게 판단을 맡기는 일은 다르다.
기술업계는 사람을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기술보다 사람의 위명을 빌려서 이야기하는 방식을 좋아한다. 복잡한 제품과 긴 개발 과정을 한 명의 창업자, 한 명의 엔지니어, 한 명의 비전으로 압축하면 설명하기 쉬워진다.
누가 방향을 정했는지 말하기도 편하고, 성공의 이유를 한 문장으로 만들기도 좋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회사의 이름보다 창업자의 이름이 더 많이 불린다. 제품을 만든 팀보다 창업자의 인터뷰가 주목받고, 수년 동안 쌓인 기술보다 한 번의 결단이 전설이 된다. 회사에서 일어난 일은 한 사람의 직관과 용기로 설명되고, 회사가 틀린 일은 그 사람의 성격이나 기행으로 설명된다.
이런 이야기가 전부 거짓인 것은 아니고, 또한 실제로 뛰어난 사람이 있으며 한 사람의 판단이 조직의 방향을 바꿀 때도 있다. 문제는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판단을 맡긴다.
한 번 좋은 제품을 만든 사람이 미래를 잘 안다고 여겨지고, 기술 문제를 풀어본 사람이 사회 문제의 해답까지 알고 있다고 여겨진다. 마치 한국의 수능 잘 친 학생이 기술 업계에서도 당연하게 큰 성과를 낸다고 믿는 것처럼 어떤 작은 성공을 거시적 전체 성공과 연관짓는 경향이 있다.
늘 성과는 권위로 바뀌고, 권위가 거의 모든 영역의 면허처럼 사용된다.
사람의 이름이 가지는 편리함
복잡한 결과를 한 사람의 능력으로 설명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제품을 만든 이유를 조직 구조와 연구 인력, 공급망, 고객 피드백, 정부 정책, 이전 세대의 기술, 경쟁사의 실패까지 따라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요약이 힘들다. 복합한 당시 정세와 시장의 상황들까지 모두 고려하기 보다는, “창업자가 방향을 잘 잡았기 때문”이라고 하면 이야기를 끝내기 쉽다.
문제는 이야기가 끝난 자리에 책임과 인과관계도 같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누가 만들었는지, 어떤 조건이 있었는지, 무엇이 실패했는지, 다음에도 반복할 수 있는 성과인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결과는 한 사람의 영감이 되고, 나머지는 배경이 된다.
이 방식은 사람을 칭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조직을 운영하는 방식에도 들어온다. 창업자의 판단이 맞았다는 경험이 쌓이면, 회의와 검토는 느린 절차로 보이기 시작하고, 반대 의견은 신중함이 아니라 발목 잡기로 해석되고, 실패를 설명하는 데이터보다 리더의 확신이 더 높은 자리에 놓인다.
그때부터 영웅은 성과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조직 안에서 질문을 덜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DUNE
듄이라는 소설이 있다. 프랭크 허버트라는 소설가가 쓴 SF 소설인데, 1965년에 출간된 뒤 오늘날까지 SF 장르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이 소설의 1부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왕위를 빼앗긴 귀족 집안의 소년이 사막 민족의 구원자가 되어 제국에 복수하는 이야기다. 이렇게만 적으면 전형적인 영웅 서사처럼 보이는데, 실제로 내용은 다르다.
주인공 폴 아트레이데스의 가문은 황제의 명령으로 아라키스라는 사막 행성을 맡게 된다. 아라키스는 거의 물도 없는 황무지지만,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인 스파이스가 유일하게 생산되는 곳이다. 스파이스 없이는 우주 항해도, 제국의 경제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따라서 아라키스를 지배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막 행성 하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제국의 동맥을 쥐는 일에 가깝다.
당연히 모두가 이곳을 원한다.
황제, 귀족 가문, 스파이스를 관리하는 세력, 수천 년 동안 인간의 혈통과 종교를 조작해 온 베네 게세리트, 그리고 그 사막에서 살아가는 프레멘이 서로 얽혀 있다. 폴의 가문은 이 정치적 함정 속에서 몰락하고, 폴은 어머니와 함께 사막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거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프레멘 사이에는 언젠가 외부에서 구원자가 찾아올 것이라는 오래된 예언이 있다. 폴은 놀랍도록 그 예언에 들어맞는다. 프레멘의 언어를 배우고, 사막에서 살아남고, 그들의 적과 싸우며, 심지어 보통 사람이 볼 수 없는 미래의 가능성까지 보기 시작한다.
그는 단순히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사기꾼이 아니다.
실제로 그는 정말로 특별하다.
보통 영웅 숭배를 비판하는 이야기는 영웅의 가면을 벗기고, 위대한 줄 알았던 사람이 사실은 탐욕스럽거나 무능하거나 거짓말쟁이였다고 폭로하지만 프랭크 허버트의 DUNE은 그렇지 않다. 일반적인 영웅서사 비판 클리셰의 교훈은 간단하다.
저 사람은 가짜였으니 믿지 마라.
그런데 「듄」은 훨씬 불편한 질문을 독자에게 유도한다.
저 사람이 진짜라면 어떡할 것인가?
정말 다른 사람보다 똑똑하고, 정말 멀리 볼 수 있고, 정말 기존의 부패한 질서를 무너뜨릴 능력이 있으며, 실제로 억압받던 사람들에게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는 인간이 나타난다면 우리는 그에게 어디까지 판단을 맡겨도 되는가.
폴이 무능했다면 「듄」의 경고는 쉬웠을 것이다.
프레멘이라는 사막 민족이 어리석어서 가짜 메시아에게 속았다고 말하면 그만이지만, 프레멘이 폴을 따르는 데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오랫동안 착취당했고, 제국은 부패했고, 폴은 실제로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과 싸우며 승리를 가져온다.
그러니 독자도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저 정도라면 따라도 되는 것 아닌가?
바로 그 순간 「듄」이 시작된다.
프랭크 허버트가 경계한 것은 무능한 지도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유능하고 매력적이고 존경할 만한 지도자에게 사람들이 자신의 판단력을 넘겨버리는 현상이었다.
그래서 「듄」을 두고 가끔 나오는 비판이 있다.
초인 숭배를 비판하고 싶었다면서 왜 폴을 그렇게 멋있게 그렸는가?
폴이 멋있어야 경고가 성립한다.
이 질문은 「듄」의 경고가 무엇을 겨냥하는지를 거꾸로 보여준다. 폴이 멋있게 보이는 것은 초인 숭배 비판의 결함이 아니라 전제다. 아무 능력도 없고 누구도 따르고 싶지 않은 인간을 두고 “이 사람에게 판단을 맡기지 마라”고 경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남들보다 뛰어나고, 기존 질서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 앞에서 우리 자신의 판단을 보존할 수 있느냐는 그 매력앞에서만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폴의 매력은 메시지를 훼손하는 장식이 아니다. 그 매력 자체가 독자를 시험하는 장치다.
거기에 더해서,「듄」이 더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폴이 타락하지 않아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폴에게 모이는 것은 단순한 권력이 아니다. 프레멘의 해방에 대한 열망, 제국에 대한 복수, 베네 게세리트가 오래전에 심어놓은 종교적 예언, 아트레이데스라는 가문의 정통성, 그리고 실제로 미래를 볼 수 있는 폴 자신의 능력이 한 사람에게 동시에 집중된다. 서로 다른 이유로 움직이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제 하나의 이름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폴은 그 순간부터 단순히 명령을 내리는 지도자가 아니다. 사람들이 세계를 해석하는 기준 자체가 된다.
평범한 권력자는 잘못된 명령을 내리면 반대할 수 있지만, 그러나 어떤 사람이 민족의 해방자이자 예언의 성취이며 미래를 보는 존재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면, 그의 판단에 반대하는 행위 자체가 공동체의 목적에 반대하는 것으로 바뀔 수 있다. 개인에 대한 신뢰가 정치적 정당성으로 변하고, 정치적 정당성이 다시 종교적 확신으로 강화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은 폴 개인의 의지만으로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폴이 실제로 뛰어날수록 이 과정은 더 강해진다. 그의 승리는 예언의 증거가 되고, 예언에 대한 믿음은 더 많은 사람을 움직이며, 더 많은 사람이 움직일수록 폴은 다음 승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성공이 신화를 증명하고, 신화가 다시 성공을 가능하게 하는 자기강화가 시작된다.
따라서 「듄」에서 위험한 것은 “좋은 사람이 나중에 나쁜 사람이 되는 순간”이 아니라, 개인에게 감화된 개개인이 군중이 되기 시작할때 발생한다.
한 인간의 능력과 성공이 그 인간에게 더 많은 판단권을 위임해야 한다는 근거로 변하는 순간이다.
폴이 선한가 악한가는 부차적 문제다. 아무리 선한 인간이라도 자신의 이름 아래 결집한 수백만 명의 믿음과 이해관계와 복수심을 완전히 소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지도자도 자신의 이름 아래 결집한 집단이 그 이름에 부여하는 모든 의미를 통제할 수 없다. 지도자는 운동을 시작할 수 있지만, 운동이 충분히 커진 뒤에도 그것의 주인으로 남는다는 보장은 없다.
허버트가 경계한 초인은 그래서 폭군과 조금 다르다. 폭군은 우리에게 복종을 강요한다. 그러나 더 위험한 초인은 우리가 스스로 판단을 그에게 맡기고 싶게 만든다.
이 지점에서 「듄」은 실리콘 밸리식 IT업계의 영웅주의와 교차로에 선다.
기술업계에서 숭배받는 사람들도 대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가짜가 아니다. 오히려 실제로 좋은 제품을 만들었고, 남들이 틀렸다고 할 때 맞았으며, 조직이 움직이지 않을 때 결단해서 성과를 낸 사람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들의 다음 판단에도 더 높은 값을 매기는 것은 어느 정도 합리적이지만, 문제는 그 합리적인 신뢰가 어느 순간 검증의 면제로 바뀐다는 데 있다.
“저 사람은 이 문제에서 여러 번 맞았다”가 “저 사람은 다른 문제에서도 아마 맞을 것이다”가 되고, 다시 “그러니 저 사람의 판단을 굳이 의심할 필요가 없다”로 넘어간다. 성과가 신뢰를 만들고, 신뢰가 권한을 만들며, 늘어난 권한으로 다시 성과를 만들면 그 사람의 권위는 더 커진다.
폴의 승리가 예언을 증명하고 예언이 다음 승리를 가능하게 했던 것과 구조가 비슷하다.
능력과 권한을 분리해서 보자
IT업계에서 영웅주의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의외로 합리적인 곳에서 출발을 한다. 어떤 사람이 여러 번 어려운 판단을 맞혔다면, 다음 판단에도 높은 신뢰를 보이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문제는 이 신뢰가 같은 맥락의 문제 안에서만 머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제품을 성공시킨 사람에게 조직에 대한 권위가 붙고, 조직을 성장시킨 사람에게 산업에 대한 권위가 붙으며, 산업에서 성공한 사람에게 사회의 미래를 말할 권위까지 붙는다.
처음에는 “이 사람은 이 문제를 잘 안다”였던 문장이 어느 순간 “이 사람은 남들보다 미래를 잘 본다”로 바뀐다.
성과가 전문성의 증거에서 인물 자체의 권위로 변하는 것이다.
능력은 관찰할 수 있는 성과이고, 권위와 권한은 군중이 부여하는 것이다. 둘은 별개이다. 한 사람이 어떤 일을 잘하는지와, 그 사람에게 무엇을 결정하게 할지는 다른 문제다.
제품 설계를 잘하는 사람이 조직 문화를 잘 설계한다는 보장은 없다. 회사를 성장시킨 사람이 규제와 노동과 사회 정책에 대한 최종 판단까지 잘한다는 보장도 없다. 개발을 잘하는 사람이 모든 개발자의 작업 방식을 정할 이유도 없다.
뛰어난 제품 판단은 뛰어난 제품 판단의 증거다. 그것이 곧 노동 정책, 정치, 교육, 사회 제도, 다른 기술 분야에 대한 판단 능력의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새로운 영역으로 권한이 넘어갈 때마다 새로운 근거가 필요하다.
문제는 영웅을 인정하는 데 있지 않다. 한 영역에서 획득한 권위를 다른 영역으로 담보 없이 이전하는 데 있다.
영웅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신이 얻어낸 영역 밖에서까지 권위를 유효 범위로 넓힌다.
영웅은 언제 만들어지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영웅이 만들어지는 순간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칭찬하기 시작할 때가 아니다.
그 사람의 판단을 검증하지 않아도 된다고 느끼기 시작할 때다.
처음에는 그의 의견도 다른 의견과 경쟁한다. 데이터와 비교되고, 반대 의견을 듣고, 실패하면 수정된다. 하지만 성공이 반복되면 판단 과정 자체가 달라진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은 점점 줄어들고, 대신 “저 사람이라면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가 들어오고 그 사람의 말에 대해서 조직은 순응한다.
여기서 능력은 권력으로 바뀐다.
틀리지 않는 사람이어서 권력을 얻는 것이 아니다. 권력을 얻었기 때문에 틀렸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어려운 사람이 된다.
영웅의 실패는 왜 영웅을 죽이지 않는가
거기에 더해서, 이상한 점은 영웅이 실패한다고 해서 반드시 영웅주의가 끝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성공했을 때는 그의 통찰력이 증명되었다고 말한다. 실패했을 때는 조직이 충분히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고 말하거나, 직원들이 비전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거나, 시장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성공과 실패가 서로 반대되는 증거가 아니라, 모두 같은 사람의 위대함을 설명하는 재료가 되기 시작한다.
성공하면 “역시 그가 옳았다.”
실패하면 “세상이 아직 그를 따라오지 못했다.”
여기까지 오면 영웅서사는 반증하기 어려운 체계가 된다.
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포기하는가?
실제로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제품을 훨씬 잘 보고, 어떤 사람은 기술의 방향을 몇 년 먼저 읽으며, 어떤 사람은 수천 명의 조직이 움직이지 못할 때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런 차이를 없는 척하는 것은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스티븐 잡스, 일론 머스크 등등
스티브 잡스도 그랬고, 지금 살아 있는 인물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사례를 하나 고르자면 일론 머스크가 있다.
일론 머스크는 어떤 사람들에게 "여러 문명을 가로질러 미래를 읽고, 기존 제국을 부수고, 인류를 다음 단계로 데려갈 수 있는 단일 인물"처럼 보인다. 전기차, 우주, AI,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터널, 소셜 플랫폼 같은 서로 다른 영역이 한 인물의 이름 아래 묶인다. Tesla 공식 소개도 그가 Tesla, SpaceX, Neuralink, The Boring Company를 공동창업하거나 이끈다고 설명한다.
"머스크가 가짜냐 진짜냐"는 중요한게 아니다. 오히려 실제 성과가 있기 때문에 더 강한 투사가 발생한다. 아무것도 못 하는 사기꾼에게는 사람들이 퀴사츠 해더락 이미지를 오래 투사하지 않는다. 문제는 실제로 비범한 성과를 낸 사람에게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은 판단권을 넘기기 시작할 때다.
이게 「듄」과 잘 맞는다. 폴도 단순한 가짜 예언자가 아니라 실제로 능력이 있고 실제로 특별해서 위험했다. 허버트도 "superheroes are a catastrophe"라며 초인의 실수는 너무 많은 사람을 재난에 끌어들인다고 썼다. 팬들에게 머스크는 단순한 기업가가 아니라 이런 식으로 보인다.
전기차 전환 -> 기후/산업의 구원자
SpaceX -> 인류를 다행성 종족으로 만들 사람
Neuralink -> 인간 지능의 한계를 돌파할 사람
xAI/Grok -> AI 시대의 방향을 잡을 사람
X/Twitter -> 언론/공론장의 질서를 바꿀 사람즉 한 사람이 너무 많은 미래 문제의 해답으로 상상된다.
그런데 여기서 더 흥미로운 지점은 무엇인가? 그의 실패에 대해서 그의 열성 신자들은 머스크의 성공한 혁신가 이미지를 깨뜨리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성공한 사업은 “역시 미래를 남들보다 먼저 본 사람”이라는 증거로 그의 전체 능력에 더해진다. 하지만 그는 성공만 했을까?
전기차 전환 -> Tesla를 세계적 EV 기업으로 키움
자율주행 예측 -> 2017년 LA-뉴욕 완전자율주행 시연 약속 미달성
2020년까지 100만 로보택시 운행 전망도 미달성
SpaceX -> 재사용 로켓과 민간 우주산업의 큰 성과
화성 일정 -> 반복해서 제시한 매우 공격적인 일정은 여러 차례 뒤로 밀림
Cybertruck -> 전기 픽업이라는 강한 상징성과 실제 제품 출시
Cybertruck 약속 -> 2019년 $39,900 시작가·500+ mile 최고 주행거리 제시
실제 2023년 출시는 시작가 $60,990,
초기 사양도 약속한 최고 주행거리에 크게 못 미침
Tesla Roadster -> 초고성능 차세대 EV의 상징으로 2017년 발표
Roadster 일정 -> 2020년 출시 예정이었지만 2026년 8월에도 아직 출시되지 않음
Boring Company -> 실제 터널을 건설하고 Las Vegas Loop 운영
초기 비전 -> 초고속·대규모 도시 교통망이라는 초기 비전에 비해
실제 구현은 훨씬 제한적인 형태로 진행성공은 사람에게 귀속되고 실패는 사건에 귀속되는 셈이다.
이것이 반복되면서 이상한 비대칭이 존재하게 된다. 전기차나 우주산업에서의 성공은 그가 AI와 정치와 언론의 미래까지 더 잘 판단할 것이라는 근거로 확장되지만, 그의 실패는 그저 운이 나빴고 경쟁자의 방해 정도로만 치부된다.
물론 실패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의 다른 성과를 무효로 만들지는 않겠지만, 그 역시 똑같이 잘못된 추론이다. 중요한 것은 성공과 실패를 같은 단위로 평가하는 것이다. 어떤 성공은 그 영역에서의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이고, 어떤 실패는 그 판단이 틀렸다는 증거다. 어느 쪽도 한 인간 전체에 대한 최종 판결이 될 필요는 없다.
영웅주의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성과를 평가하는 대신 사람을 평가하기 시작하고, 한번 ‘뛰어난 사람’이라는 지위를 얻으면 이후의 개별 판단들이 그 지위의 후광 아래 들어간다.
그런점에서 "머스크 숭배"와 "머스크 혐오"는 사실 거울상일 수 있다. 숭배자는 그를 인류의 구원자로 보고, 혐오자는 그를 모든 문제의 원흉처럼 본다. 그런데 둘 다
한 인간에게 과도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며, 그를 역사의 한 사람으로 영웅으로 만든다. 이것은 우리의 이성을 가린다.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성과는 성과로 인정하되, 그의 성과가 그의 모든 판단을 정당화하지는 않아야한다.
그는 미래를 여는 인물이 될 수는 있어도, 당신과 나의 미래를 위임 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여야한다.

(프랭크 허버트)
허버트는 그의 에세이 "Dune Genesis" (Omni, 1980)와 여러 발언에서 이렇게 말했다.
"Don't give over all of your critical faculties to people in power, no
matter how admirable those people may appear to be."
(아무리 존경스러워 보이는 사람이라도, 권력을 가진 자에게 네 비판적 판단력을
통째로 넘기지 마라.)
뛰어남은 권력을 정당화할 수 있지만, 무제한의 권력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뛰어난 사람에게 사회가 더 많은 발언권을 줄 수 있고, 더 큰 결정을 맡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을 검증하는 절차까지 제거해야 할 이유는 없다.
혹자는 불필요한 절차이며, 혁신을 망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혁신이 과연 공동체의 이득이 되는 혁신인가?에 대한 질문을 떠나서.
절차는 한 사람의 확신을 공동체의 결정으로 바꾸기 전에, 그 판단이 그 사람의 이름 없이도 설명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존재하여야만한다.
그 과정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없애버리면 조직은 더 빨라질 수 있다.
다만 그 순간부터 우리는 빠른 조직을 얻는 대신 한 사람의 판단이 틀렸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어려운 조직을 만들 위험도 함께 산다.
그가 남보다 많이 맞혔다는 사실과 앞으로 질문받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성이 없다.
허버트가 경고한 것도 결국 이 간극이었다고 생각한다.
폴이 가짜였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 아니다. 폴은 진짜였으며, 그가 남들보다 뛰어났고 실제로 승리를 가져왔다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의 판단을 그에게 넘겨주고 싶어졌다는 것이 위험했다.
기술업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영웅주의의 오류는 뛰어난 사람이 존재한다고 믿는 데 있지 않다. 뛰어남을 판단권의 백지수표로 바꾸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