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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두려워하고 소리친다.

나는 모르겠다.

Makonea
··8분

모든 것의 가장 우선시 되는 대전제는 사람은 모든 것을 알 수 없다이다.
모든 사람은 현실 전체를 다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를 줄여서 다룬다.
물리학에서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마찰을 지울때도 있다.
경제학은 사람을 몇 개의 변수로 바꾸고, 소프트웨어 설계는 수많은 사건을 인터페이스와 상태 전이로 정리한다. 수학은 정의와 공리로 문제의 경계를 닫는다. 프로그래밍도 현실의 일부를 입력, 출력, 상태와 규칙으로 잘라 내어 다룬다.

우리는 늘 세상을 단순화하려 한다.

사람은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불안감을 태생적으로 견딜 수 없어서 수많은 이론과 가설을 쏟아낸다.

세계의 격동기마다 사람들은 늘 불안해하며 자기만의 이론을 소리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집단을 형성해서 집단의 목소리로 타 집단을 공격하거나, 또 흡수된다.

우리는 불확실성을 무서워한다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미래가 불안정할 때 사람은 "모르겠다"보다 선명한 이야기를 원한다. 내 기술이 사라질지, 지금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투자한 시간이 헛되지 않을지 불안하면 한쪽 편을 고르는 일이 심리적으로 편하다. 확신은 정보를 늘려 주지는 않지만, 행동할 이유를 준다.

전환기가 다가올수록 이러한 소리가 커진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상한 소리다. 옳다는 게 무엇이고 어떤 것이 선명하다는 것인가. 그런 가치는 그저 인간이 부여할 뿐이다.

우리는 추상적인 개념에 매몰되고, 한 시대가 요구한다고 여겨지는 무언가에 매달린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 않나. 무엇이 옳고 무엇이 선명한지는 언제나 어떤 전제와 시간 범위, 이해관계 안에서만 정해지고, 그마저도 그저 인간이 부여한 인위적인 가치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전제를 지운 채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대의 진실처럼 말한다.

하지만 시대마다 그런 문장은 반복해서 나타나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한다.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
“이번 기술은 모든 것을 바꾼다.”
“이 직업은 곧 사라진다.”
“지금 당장 배우지 않으면 뒤처진다.”
“이번에는 이전과 다르다.”
각각의 문장에는 일부 사실이 들어 있을 수 있으나, 문제는 부분적인 관찰이 곧바로 시대 전체를 설명하는 이야기로 확장된다.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반복된다. 그 말은 아랫세대의 개별적인 조건을 지운 뒤 하나의 집단으로 규정한다.

성공과 실패라는 시대정신은 그저 정보의 비대칭속에서 누군가가 이득을 위해, 불안을 통제하기위해 사람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특정 집단 편향 논리일뿐이다.
물론, 경제적 성공과 경제적 실패에는 물질적인 결과가 존재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소득과 재산, 직업과 생활양식을 성공이라고 부를지는 시대와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문제는 그렇게 만들어진 기준이 하나의 가능한 기준이 아니라, 모두가 따라야 할 자연법칙처럼 제시된다는 데 있다.
수많은 언론들이 행복한 집안과 중산층이라고 규정짓는 것들이 단지 그들의 이해관계에 있는 집단에 대한 묘사일뿐이다. 행복하기 위해서 차가 필요한 것도 아니오, 거대한 집이 있어야하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는 자연을 벗삼고 싶지만, 누군가는 자연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외부의 기준으로 자신을 재단 짓기 시작하면 절대 만족할 수 없다. 기준점이 항상 옮겨가기때문이다.

우리는 늘 자신을 복잡하고 어려운 존재로 묘사하지만, 타인은 늘 쉽고 단순한 존재로 규정짓는다.
사람들은 불확실한 현실을 오래 들여다보기보다, 그 현실에 이름을 붙이고 편을 나누고 행동 규칙을 만드는 쪽을 택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는 예측이라기보다 불안을 관리하는 스트레스 조절장치일뿐이다.

최근에 유행하는 AI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다.

AI를 사용하지 않으면 사용하지 않는 것뿐이고,
AI를 사용하면 사용하는 것뿐이다.

어떤 집단의 행동 양식에 따라 바뀌는 것뿐이고, 그게 각각의 정답이 아니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아서 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남의 눈에 어떻게 보여야하는지, 그리고 강제로 연결된 사회망에서 요구하는 '행복'이라는 허상에 매몰되면서 그 허상에 자신을 맞추려 한다.

가치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내가 받아들인 가치인지, 아니면 타인이 자연법칙처럼 강요한 가치인지다. 누군가는 명예에, 누군가는 돈에, 누군가는 가족이나 창작에 목숨을 걸 수 있다. 자신이 그것을 선택하고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무엇을 ‘나의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내 세계관은 수많은 단편적인 가치관이 서로 포개지며 만들어진다. 나는 타인을 모방하고, 남의 세계를 가져와 내 안에 적용한다. 그렇게 빌려 온 생각은 어느 순간 내 세계의 일부가 된다. 무엇이 처음부터 내 생각이었고 무엇이 남의 생각이었는지, 그 경계조차 정확히 그을 수 없다.

그러나 생각의 기원이 외부에 있다는 사실이 곧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인간에게 완전히 독창적인 세계관이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어진 것들을 받아들이고, 거부하고, 수정하고, 다시 배열하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남은 흔적을 잠정적으로 나의 세계관이라고 부를 뿐이다.

나는 그것이 순수하게 내 것이라고 확신해서 믿는 것이 아니다. 다른 방식으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불완전하게 만들어진 그 세계를 일단 나의 것이라고 믿고 살아간다.

영미권 사이트를 활동하고, 현장에 활동하며 한국의 교수들과도 작업해보고,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을 만나보고, 유명한 교수들의 SNS를 훔쳐보아도 그들은 그저 불안에 떠는 작은 인간일뿐이었다.

어떤 사람은 과거에 매몰되어 있었고, 어떤 사람은 외부의 기준치에 매몰되어있었다.

그리고 이게 바로 나의 모순이며, 타인에 대한 판단조차 내가 만든 또 하나의 단순화이고, 나는 이 단순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저들이 불안에 떠는 인간일뿐이라고 규정짓는 그 자체가 내가 말했던 단순화이며, 내가 인간인 증거이다.

결국 나또한 매한가지일뿐이다.

인간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단순화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만든 단순화를 세계 그 자체로 착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인지적인 작은 세계와 다른 세계를 만나면 다시 공포에 떨며 소리친다.

인간은 별 볼일 없는 존재다.

그리고 굳이 별 볼일 없어도 된다는 생각을 한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산다. 무엇을 아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확신하는지도 모르고, 어떤 것이 내 것인지 내것이 아닌것인지 아니며, 사회적으로 별 볼일 없지만, 내가 지켜본 남들도 다 보잘것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내 자신이 좋다.

남들과 다르지 않아서. 그리고 또 지독하게 멍청해서.

그리고 또 남들을 쉽게 단순화하고, 현상을 쉽게 볼 수 있어서 세계를 지켜보는 망원경으로 화질이 지독하게 나쁘지만, 나는 이정도면 만족한다.

나는 내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