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zotero를 삭제했다.
읽었던 책들을 기록하고 정리해둔거였는데, 너무 역할을 잘해서 삭제했다.
매번 책을 기록하기위해서 zotero를 썼는데, 어느샌가 책이 아니라, zotero에 책을 추가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 느낌이고, 지적 허영심에 가까운 느낌이라 DB까지 삭제해버렸다.
마음이 후련하다.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서 고민 해봤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는 소크라테스가 문자의 발명을 비판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집트의 신 테우트가 문자를 발명하고 그것이 인간의 기억과 지혜를 향상시킬 것이라고 주장하자, 타무스 왕은 오히려 문자가 사람을 망각하게 만들 것이라고 반박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기억을 사용하는 대신 외부에 기록된 문자에 의존하게 되고, 많은 것을 읽었다는 이유로 자신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문자는 기억을 위한 약이 아니라 상기를 위한 수단이며, 참된 지혜가 아니라 지혜의 외양을 줄 수 있다는 비판이다.
인간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다.
문자가 없었다면 수많은 지식은 축적되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문자 비판을 읽을 수 있는 것도 플라톤이 그것을 문자로 남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독서를 하다보면 책을 읽는 행위 자체를 신성시 하는 경향이 생긴다.
사실 책 자체는 기본적으로 그 시기에 머물러있는 고대 정보이고, 책 자체는 신성시 할 무언가가 아니다. 그 안에 담겨있는 정보가 중요한 것이고, 그 정보는 책 자체가 나온 시기에 머물러 있다.
책을 읽으면서 책이 가지는 논리적 흐름을 추적하는 능력이 독서로 함양되기도 하지만, 어떤 책은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해서 비판적 읽기를 하지 않으면 강하게 매료되기도 한다.
결국 저자의 논리에 무비판적으로 매료되는 것이나, Zotero에 읽은 책의 목록을 차곡차곡 쌓아두며 만족하는 것이나 뿌리는 같다. 읽고 나서 기억에 지우고 그 만족감만 남긴다면 그게 과연 필요한 행위인가?
쇼펜하우어는 독서를 가리켜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대신 남에게 생각을 대행시키는 일'이라고까지 혹평했다. 남이 그 시대의 한계 안에서 조립해 놓은 완제품 사유를 내 머릿속에 그대로 들여놓으면서, 혹은 내 컴퓨터 DB에 깔끔하게 분류해 놓으면서, 마치 내가 그만큼의 지혜를 얻은 것처럼 안도하는 것이다. 타무스 왕이 경고했던 '지혜의 외양'이 나의 행태였을 것이다.
책은 그저 저자가 살던 시대의 문제의식을 담은 오래된 연장일 뿐이다. 책을 읽고 남는 진짜 결과물은 내가 그걸 읽으면서 조금씩 변경한 내 머릿속의 사고 체계여야하는 것이지. 책을 읽었다는 만족감이 되어선 안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생각조차도 잘 못된 사고가 될 수 있다. 생각을 변화시키지 않는 독서는 의미가 없는 것인가? 아니, 의미 그 자체가 어쩌면 인간이 부여하는 무언가일 뿐인데. 그렇게 머릿속에 도돌이 표로 맴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정답이 없는 문제다. 시간이 변하면 또 나는 다른 결론을 낼 것이다. 늘 그렇다. 나는 유약하고, 언제나 변한다.
나중에는 내가 지운 책의 구절이 안 떠올라서 다시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구체적인 문장은 어차피 다시 찾으면 된다. 요즘은 인터넷도 잘 되있으니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른 발견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내 생각 체계가 변한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내가 지운 것은 책을 읽었다는 증명서일뿐이다.
그리고 글을 쓴다. 이 글을 쓴다는 행위조차도 사실 어쩌면, 내가 방금 지운 Zotero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블로그에 글을 차곡차곡 쌓아두는 것도 일종의 수집이고, 누군가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지적 허영심의 또 다른 얼굴이니까.
타무스 왕이 비판한 '지혜의 외양'은 Zotero를 지운다고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차이가 하나 있다면, Zotero는 남의 생각을 보관하는 창고였고 이 글은 내 생각을 꺼내 조립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내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내 것이 아닌 결과물을 나열하며 나는 계속해서 나와 싸운다. 글을 쓰는 이유다. 내일은 또 어떻게 생각이 변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