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살의 7월 9일 생일을 보내며

92년 7월 9일생
올해로 만으로 치면 34세, 한국나이로는 35세이다.
현재 수주 해본 최고 프로젝트 금액은 2000만원.
발매한 프로덕트 4건
납품 횟수 400건
기업 납품 42건
아마 내 커리어의 최초 시작 선택지를 잡자면
경산에 살때 성균관대 대학원에 합격하고, 대구에서 알던 동생이 사귀자고 했을때 였을 것이다. 그때 대학원 합격 소식 전이었는데, 같이 일하던 알바 여자 동생이 대구서 취직하고 사귀는거 어떠냐고 물어봤다.
근데 난 물리학자가 되고 싶었고 수원으로 올라갔다. 여자와의 최초이자 마지막 썸씽이었다. 하지만 나는 대학원 생활에 적응 못했다.
19년에 대학원에서 교수랑 상의하고 자퇴했었다. 교수는 나한테 재능이 없다고 했다. 틀린 말은 아녔지만, 교수는 나한테 매달 월급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고, 매번 월급을 늦게 주고 어떤 케어도 해주지 않았으면서 그런 말을 했던 점이 가증스러웠던 것도 있다. 교수한테는 미안한 것도 있고, 원망스러운 것도 있다. 반대로 교수 입장에서 나는 자기가 찾을 때 없고, 논문도 준비 안된 학생이었으리라.
대학원 생활은 돈이 꽤 많이 필요했고, 나는 그 돈이 없었을 뿐이고, 그 돈을 벌기 위해서 대학원 생활에 소홀했다.
월급이 비었을때 생활비때문에 일용직 아르바이트 등을 한다고 논문 준비를 하기가 힘들었다. 교수도 케어 해주지 않았고, 연구실에서 배운 것도 없었다. 그래도 졸업을 해볼까 생각을 했지만, 그때 박사 졸업 후 강사와 대화했을때 평균 월급을 듣고 깜짝 놀라서 자퇴를 결심했다. 교수도 내가 나갔으면 하는 눈치였는지 말하고나서 3일만에 그냥 짐을 싸고 나왔다.
어머니는 울고불고 난리였고, 아버지는 비 오는 날 먼지나게 두들겨 패셨다. 그리고 막노동 현장을 갔다.

(내가 살았던 고시원)
페인트 칠과 합판 나르기였던가 2개월을 했다. 사장님은 나한테 잘해줬지만, 그 주변에 만난 아저씨들은 항상 최악이었다. 술 먹은 이야기, 여자 만취시켜서 따먹은 이야기, 대개 오입질 이야기로 흘렀다.
계속 아래에서 일하면 오야(일종의 작업반장이다)를 시켜준다고 말했고, 실제로 나는 나름 똘똘하기도 했으며, 특히 컴퓨터 엑셀을 다룰 수 있었던 점에서 시에 제출할 양식 서류를 만질 수 있었던 점에서 날 좋아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이 일을 계속하면 탈출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돈은 조공인데 생각보다 잘줘서 매우 좋았다. 막노동이 나쁘단게 아니지만, 대부분 일종의 열등감이 있었고, 안정적이지 못했다. 나는 그게 내 미래의 모습일 거 같아서 무서웠다.
그래서 그 길로 서울로 향했다.
빚은 여전히 있고, 부모님한테 새 출발로 200만원을 받아서 고시원에 들어갔다.
신설동의 행복 고시원이었는데 그 동네에서 가장 쌌다.
창문 있는 방 32만원, 창문 없는 방 30만원.
난 30만원짜리 방에서 머물렀다.
주변에 여관 바리라해서 몸파는 여관 아줌마들이 살았고, 남자 한명은 맨날 술에 취해 있었다. 맞은 편에는 맨날 경마 보던 형이 있었다.
그곳에는 인간 군상들이 많았고, 나도 그 군상이었다.
신설동 행복 고시원에서 컴퓨터 하나 설치하면 의자 놓을 곳이 없어서 침대에서 앉은 다리하면서 이력서를 쓰고, 너무 더우면 옆 건물 PC방에 들어갔다. 거기에는 고양이를 구조하는 캣맘 여자를 사랑하는 형이 있었다. 그 형은 아르바이트로 먹고 사는 형이었다. 그 PC방은 2층과 3층이 있었고, 3층은 흡연실에 게임 작업장이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천원짜리 음료수를 먹으며 여름을 보냈다.
일용직 아르바이트(호텔 일용직, 청소 일용직, 이사 알바 등등 별의 별 것을 다했다. 이때 했던 일들이 하루에 2건씩 했으니 약 100건은 넘었으리라.)
그리고 나서 취직 아닌 취직을 했다. SI 업체에 취직했는데 정확히 말해서 직원으로 들어간게 아니라 하청 대표로 들어갔다. 프리랜서 계약인데 어떻게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어쨌건 나는 그 이유를 몰랐는데, 그렇게 계약하는게 퇴직금도 안주고 편하기 때문이었다.
대학원 경력이 있었던게 도움이 되었다. 그 업체는 통신 장비 설비 업체였는데, 이때 업체 중국인들이 짠 코드를 나는 조선족이 넘겨준 번역 문장을 코드에 넣고, 에러 로그 출력과 잡다한 코딩하는 업무였다. 거기에서 중국인들과 작업하면서 코딩을 배웠다.
그 중국인들은 전부 칭화대 출신의 엘리트였었는데, 나한테는 굉장히 잘해줬다. 당시에 중국 업체들이 한국에 진출하면서 한국을 테스트 배드로 쓰던 시기였다.
일은 나쁘지 않았다. 대부분 중국 프로그래머는 잘한다 수준을 넘어서서 매우 잘했고, 나는 그저 거기에 맞춰서 조선족 번역가가 쓴 문장을 한국에 맞게 맞춰놓고, 실제 버그가 생기면 조금 수정만 하면 됐다. 하지만 코로나가 터졌다.
중국인들은 전부 돌아갔고, 경력 6개월차라기 민망했고 사장은 추후에 연락하겠다며 연락을 끊었다. 돈이야 정산했지만 말이지.
그리고 나서 돈이 없어서 국비 지원으로 다닐 수 있는 게임 학원에 등록했다. 일단 기초적인 코드 실력은 있었다. 대학원에서 무언가 배웠으니까. 하지만 게임 학원은 시간 낭비였지만, 국비 지원이었기때문에 돈이 나왔다. 하지만 방세를 내고 나면 일주일에 이틀은 굶어야해서 살기 위해 울산에 내려왔다.
이때 코로나로 단순한 일용직도 없었던 시기라 오로지 그것만이 전부였는데,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던 시기였기때문에 서울이 아니라 울산에서 내려가서 원격으로 공부하던 시기였다.
어쨌건 이때, 원격으로 작업했는데 날 처음 고용했던 사장이 마침 울산이냐면서 울산의 공장으로 데려갔고, 거기서 울산의 제조업체 한 곳과 작업을 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첫 공장 작업을 했다.
WINFORM을 처음 접했다. 첫 작업이라고 해봤자 거창한 것은 아니고, WINFORM 낡은 레거시 코드를 현대화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물류 센터에서 바코드 찍었을때 입력되는 프로그램과 공장 UI 관련 작업을 했다. PLC라는 백엔드가 주어지면 나는 프론트 UI만 구현하면 되는 작업이었다.
그렇게 코로나시기가 끝나고 21년도에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국비지원도 마침 코로나가 풀렸던 시기라 서울에 방문해달라고 했다. 공장 코딩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공장 작업이라는 게 원청에서 나온 사람이 회사 차려가지고 하청으로 있어서 결국 인맥을 타야했기도 했거니와 급여라는게 월 200이 안됐으니까 위기감의 발로였다.(프로젝트 금액으로 받는데 2달을 굴렸다)
서울에서 좀 괜찮은 회사에 들어가고 싶었다. 면접을 여러 곳 봤다. 대부분은 날 무시했고, 프로그래밍 면접 했는데 SOLID 면접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SOLID가 반드시 지켜야할 필요가 없고, 클린 코드와 OOP 서적으로 본 이야기를 했지만, 제대로 모른다면서 자바의 상속과 오버라이딩 이야기를 하면서 무시했다. 물론 내가 맞았다. 나는 대학원 논문까지 읽으면서 배운건데 말이지.
이때 먹고 살기 위해 크몽에 등록했다. 여기서 크몽에 등록하고 프리랜서 활동을 하니까 SI 업체 한곳에서 자기가 일을 소개시켜주겠다고 했다. PHP 위주로 카페24와 가비아등에 올리는 곳이었는데, 절대 다수는 도박 - 사기 사이트였다. 처음 2개 정도는 했었는데, 이후에는 허가받지 않은 업체라는 사실을 깨닫고 멈추었다. 하지만 그덕분에 실제 쇼핑몰과 웹사이트 템플릿들을 얻을 수 있었다.(멀쩡한 CMS인 척 템플릿에 맞게 코드 짜달라고 한 후에, 막상 올리고나면 도박 사이트로 바꾸는 구조다.)
그 이후 주로 했던 것은 대학생과 대학원생들 논문 데이터셋과 자료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졸업과제 대행 같은 것도 자주 했다. 서울대부터 카이스트, 한국 과기대 등등 어느정도 손을 거쳐 지나갔다.
그렇게 서울에서 지내다가 서울에서 칼에 맞았다. 조현병 영감이었는데, 방세를 못내서 고시원 주인과 실랑이하다가 홧김에 과도를 휘두르다가 나는 배 우측에 과도에 찔렸다. 혜화 경찰서에도 잠깐 들락거렸다.
그 일때문에 고시원 주인은 낡은 고시원 운영을 못하겠다하고 고시원을 문닫으려고 한다고 말했고, 나도 울산으로 내려갈 채비를 했다. 고시원이 공용 화장실, 공용 샤워실들도 낡고, 너무 위험해서 소방법 문제도 있었다고 들었다.
그렇게 고시원 나간 후에 잠깐이지만, 업체에 들어가서 큰 프로젝트를 했다.
2천만짜리 프로젝트였다. 여러 장비에 대해서 코딩 하는 프로젝트였는데, 20대에 달하는 장비에 하나하나 코드를 짜넣었다. 이런 공장 코딩은 작업지시서에 맞춰서 동작하는지 체크하고, 실제 체크하는 식으로 나름 이때 자신감이 붙었었다.
이정도면 프로그래머로써 자리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모아둔 돈으로 방을 잡다가 사기를 당했다. 나말고 다른 계약집이 있었다. 1년 겨우 살았는데. 23년이었다.
울산에 내려왔다. 집에 들어왔다. 어머니 아버지한테는 그냥 서울에 있을때 있던 돈을 빚갚는데 썼다고 말했다. 그래서 실제 빚은 400쯤 있다고 말했다. 사실 그때 700정도 있었다.
이 시점에서 결혼은 포기했고, 크몽도 이 시점에 외부 거래 유도로 영구정지를 먹었다. 크몽을 통해서 거래 안하고 통장 거래하면 정지를 주는 것이다.
문제는 크몽에서는 나름의 신뢰와 리뷰가 있어서 일이 있었다. 하지만 크몽이 정지되고, 울산 공장 일은 서울에 있는 동안 업체가 문닫으면서 사라졌었다. 정말 미치도록 힘들었다.
23년도에 GPT를 조금씩 쓰면서 그때 혼자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 프로그래밍 실제 논문과 영어 문서들을 거의 통째로 읽었다. 남는게 시간 뿐이었으니까. 이때 칭화대 다녔던 중국 개발자와 위챗으로 다시 연락이 됐고, 해외 개발자들과 소통을 통해서 내 프로그래밍 세상이 얼마나 좁았는지 깨달았다. 해외 개발자들한테 메일을 주고 받고, 리뷰 받고 책 추천하고, 디스코드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들이 '키워드'를 얻는게 중요했다. 전직 구글 프로그래머가 게임 개발하는 트위치를 가서 구경하면서 말 걸거나 하면 다들 하나같이 친절했고, 책들을 추천해주었다. SAP 프로그래머도 있었고 하나같이 나에게 세상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24년까지 일용직 노가다와 그나마 간간히 연줄로 작은 일들과 더불어 논문을 읽었다.
그래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운이 좋게도 내가 도와줬던 대학생들은 석사-박사를 밟았고, 그때 논문 써야할때 데이터셋 구해달라 했고, 나는 구해줬고, 게임을 만들겠다는 일념 오로지 그 하나만으로 버텼다.
빚도 많이 줄었었다. 다시 200만까지 줄였다.
하지만 24년도에 게임 에셋 구매를 시도했는데 330만을 입금 받은 그림쟁이가 입금만 받고 그림 에셋을 주지 않았다. 결국 게임 출시는 포기했다.
다만, 그러고나서 호텔 월패드 업체와의 작업,드론 관련한 작업등을 해서 돈을 조금 벌었다. 그리고 WPF 작업들을 통해서 POS기 업체와 몇몇 작업했던게 도움이 됐다.
하지만 24년도 시점에 GPT가 보편화되면서 점점 몸값이 박살나기 시작할 조짐이 보이더니 25년도부터는 거의 시장 몸값이 박살났다.
예전에는 사소한 일이더라도 프로그래밍 일이다보니 30~50만이었는데, 단가가 10만까지도 떨어졌다. 랜딩 페이지 작업은 100만에서 20만이 됐다.
25년, 이때 숨고를 시작했다. 그래도 운좋게 기존 업체와 연이 닿았고, 그 업체들이 숨고에 초반 리뷰를 작성해주어, 다시 손님을 모집할 수 있었다. 25년도에 창업을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존에는 프리랜서로 고용된 형태였다면 지금은 진짜 개인 사업자로 등록되있다.
그리고 26년 초에 완전히 빚을 다 갚았다. 스마트 팜 프로젝트가 컸다.
그렇게 정리해보니 자잘한 건들은 400건이 넘었고, 기업 거래는 40건이 넘었다.
26년도에 빚을 다 갚고 나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나름 프로그래머로써 이름있고 싶다.
해외 프로그래머 친구들과는 연락이 끊겼지만(아마 매번 물어보기만 하니까 귀찮았던거겠지) 그들의 조언대로 오픈 소스를 탐방하고, Hack News에서 활동도 해보고 있다.
그리고 기존에 폐쇄됐던 기술 블로그를 되살렸다. 프로그래밍 자체는 플래시 시대때부터 했고, 그 시대의 기술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글루스의 서비스가 폐쇄되면서 내 10년간의 지식과 일기가 사라졌다.
그래서 내가 배운 기술들을 써서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IPv6 부터 시작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들만 넣었다. OWASP 위반도 전부 테스트했다(물론 나는 보안 전문가가 아니라서 뚫리긴 뚫릴 것이다)
사실 기업거래라고 해봤자 단일 프로젝트 금액만 따지면 200~300수준이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나름 거래는 거래다. 하지만 나는 프로젝트 횟수가 내 나이 또래 프로그래머보다 훨씬 많다. 그리고 심지어 중국/미국/영국/독일/일본 프로그래머와 대화하고 그들이 어디서 정보를 얻는지 아니까 나는 나만의 유니크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올해도 살아남았다. 하지만 통장 잔고는 0원에 여자와는 인연도 없다.
AI는 언제나 내 숨통을 조르고 있지만, 반대로 나는 AI를 곧 잘 쓴다.
그래도 일단은 살아남고 살아가고 있다.
성공은 내 생각에 꽤 요원해 보인다.
그래도 일단 살아는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