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스마트폰은 사회의 보상 체계를 정량화한다
요즘 사회를 보면 스마트폰이 문제고 학생들은 중독되어있고, 스마트 폰이 문제다라는 말들을 많이 한다. 하지만 나는 늘 다르게 생각한다.
왜 학생들이 스마트폰에 중독되어있을까?
인정 욕구, 외모 평가, 예술적 성공, 팔로워 수, 사회적 지위 경쟁. 이 모든 것이 스마트폰이라는 인터페이스를 통해 정량화되었다.
학벌, 외모, 성적 매력은 사회가 보상하는 강력한 자원이다.
일본의 "부모 가챠", 한국의 "수저 계급론", 부모의 계급이 자식의 평생 결과를 결정한다는 명제는 사실에 가깝다. 이는 미국의 콜먼 보고서에서 공립학교의 교육기회 평등을 대규모로 조사한 콜먼 보고서도 한국의 수많은 학회에서도 나온 사실이다. 1

그리고 그 자원의 출발선은 대체로 물려받는다.
부모가 사장이면 자식은 사장하고, 부모가 배달기사면 배달기사를 한다.
그리고 이는 어느정도 사실에 가깝다. 개천 용을 주장하지만, 그 부모들도 알것이다. 자신이 물려줄 수 있는 것은 가난밖에 없다는 것을.
사장을 부모로 둔 자식은 나같은 프리랜서 프로그래머에게 와서 고등학교 과제등을 도와달라고 한다.
내가 그렇게 특출난 실력이 아닐지라도, 서울대학교 특정 연구실에 존재하는 낡은 레거시 C++코드를 리팩토링 하는 요청까지 소화해낼 수 있는 실력이 있다. 고려대 박사의 논문에 들어가는 대량의 데이터셋과 특정 모델링 검출 기법까지 납품한 바가 있다. 나는 현대 자동차 연구소에 들어가는 검품장비 프로그래밍 코드를 납품했다.
내가 그렇게 특출나게 잘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고등학교 학생들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리고 이 방법론을 배우고나면 당연히 그 학생은 더 잘하게 된다. 그리고 이 차이는 1회로 끝나는게 아니라 계속해서 누적된다. 나는 그 사장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가르쳐주며 일거리를 받는다. 하지만 가난한 부모는 그런 커넥션 조차 없다.
그런 지점에서, 스마트폰은 이 출발선의 차이를 매일 확인시켜 주는 화면이다.
자신의 족쇄를 보여주는 화면이다. 하지만 대체로 나이가 있는 어른들은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걸 이해할 수 있는 인지 능력이 없기때문이다. 가난은 인지능력을 고갈시킨다. 그저 그들은 자신의 가난이 자기의 노력 부족을 탓한다. 70~90년대에 있었던 고도 성장기는 인류 역사로 따지면 매우 짧았던 아주 특수한 상황이라는 걸 인지 못하고, 그저 그 시대의 노력만 빗댈뿐이다.
늙어서 지혜로워지는 사람이 있지만, 대다수는 그냥 늙을뿐이고, 인지가 고갈된 채로 늙으면 그저 고집만 남은 자가 된다. 늙는다고 대단한 지혜를 가지지 않는다. 인간의 지혜는 단련해야 만들어지는데, 그 지혜를 쓸 여유가 없어지니까.
2. 왜 가난할수록 더 빠지는가: 그것이 유일한 레버리지라서
가난한 사람에게 스마트폰은 단순한 오락 기기가 아니다. 그것은 거의 유일하게 남은 저비용 레버리지다.
돈이 있는 집의 아이는 과외를 받고, 좋은 학군에 들어가고, 부모의 인맥을 통해 좋은 기회를 얻고, 실패해도 다시 시도할 수 있다. 좋은 카메라, 좋은 옷, 좋은 공간, 좋은 언어, 좋은 취미, 좋은 경험도 부모의 자원 위에서 시작된다. 반면 가난한 아이에게 남는 것은 대체로 싸구려 스마트폰 하나와 인터넷 연결이다.
어렸을때 5색 크레파스를 쓰는 아이가 표현할 수 있는 색의 세계는 5색이다.
어렸을때 24색 크레파스를 쓰는 아이가 표현할 수 있는 색의 세계는 24색이다.
다양한 경험이 아이에게 더 많은 인지를 주고, 더 많은 것을 알게한다. 사람들이 다르다는 사실과 이런 일들이 있다는 것. 가난한 자식이 얻을 수 있는 세계와는 다르다.
그러니 그 아이가 스마트폰을 놓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다. 그 화면 안에는 자신이 들어갈 수 없는 세계가 있고, 동시에 혹시라도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는 입구도 있다.
공부 영상, 코딩 강의, 쇼츠, 릴스, 틱톡, 인스타그램, 유튜브, 라이브 방송, 중고거래, 구인글, 부업 광고, AI 도구, 커뮤니티. 전부 쓰레기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전부 기회처럼 보인다.
문제는 그 기회가 대부분 복권에 가깝다는 것이다. 누구나 영상을 올릴 수 있지만, 모두가 유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지만, 모두가 읽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코딩을 배울 수 있지만, 모두가 좋은 프로젝트와 좋은 멘토를 만나는 것은 아니다. 스마트폰은 기회를 민주화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존의 자원 차이를 더 빠르게 증폭한다.
내가 속한 프로그래밍 계열조차도 명확하다. 영어를 어렸을때 배우지 못했다면 한글의 저주를 받아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이 몇년이고 뒤쳐진다. 모든 자료는 영어이고 오픈소스로 배울 수 있는 기회도 박탈된다. 한국은 내수 시장이 좁고, 서울 근교에서만 벗어나도 '좋은 프로그래밍'을 배울 기회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많은 아이들은 미디어가 만든 해커 이미지에 열광한다. 어두운 방에서 혼자 키보드를 두드리며 거대한 시스템을 뚫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세상을 뒤집는 천재의 이미지 말이다. 과거에 프로그래밍은 단순한 지점이 있었기에,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절대다수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프로그래밍은 고독한 천재의 손끝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좋은 언어 환경, 좋은 문서, 좋은 멘토, 좋은 코드베이스, 좋은 질문을 할 수 있는 공동체 위에서 자란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이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다는 점이다.
영어권 아이는 공식 문서와 에러 메시지와 GitHub 이슈와 Stack Overflow와 논문과 컨퍼런스 발표를 자기 언어처럼 읽는다. 반면 비영어권 아이는 먼저 번역해야 한다. 단어를 번역하고, 문장 구조를 번역하고, 그 뒤에야 개념을 이해한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 차이가 아니다. 학습 속도, 접근 가능한 자료, 질문할 수 있는 공간, 심지어 스스로를 유능하다고 느끼는 감각까지 갈라놓는 인지세다.
한국어권 프로그래머가 겪는 어려움도 여기에 있다. 한국어 자료의 절대다수는 나쁘다. 좋은 자료의 밀도와 최신성은 영어권에 비해 얇다. 많은 경우 한국어 자료는 이미 한 번 늦게 번역된 자료이고, 그 번역조차 정확하지 않거나, 현장의 나쁜 관습을 그대로 전달한다. OOP의 붕어빵론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면 초보자는 잘못된 코드와 낡은 설명에서 출발한다. 출발이 잘못되면 나중에는 코드만 다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 기준선 자체를 다시 고쳐야 한다.
서울 근교에서 멀어질수록 이 문제는 더 커진다. 좋은 회사, 좋은 동료, 좋은 프로젝트, 좋은 스터디, 좋은 커뮤니티는 대체로 특정 지역과 특정 계층에 몰려 있다. 인터넷이 모든 것을 열어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좋은 것을 알아보는 눈도 자원이다. 무엇이 좋은 문서인지, 어떤 코드베이스를 봐야 하는지, 어떤 질문이 의미 있는지, 어떤 기술이 유행이고 어떤 기술이 기반인지 구분하는 능력은 혼자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대체로 좋은 환경에서 물려받는다.
그리고 적어도 최소한의 참여를 위한 영어 교육조차도 부모가 영어를 조기에 대화하거나 문서를 읽게 교육하는 금액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이를 보통 세종대왕의 저주라고 부른다. 한글은 민족성이라는 허구의 개념을 강조하는데 좋지만, 지식의 접근의 격차를 만들고, 그 내부의 기득권에게만 기회를 준다.
이건 심지어 김박사넷부터 시작해서 하이브레인넷 같이 한국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곳에서도 볼 수 있다. 그들이 해외 박사를 선망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그들은 서양, 특히 미국의 기술과 서양의 격차를 보따리상해서 가져오며 그 안에 학연의 연결고리로 서로를 물어뜯는다.
그게 가장 재밌는 지점이다. 교수든 박사든 항상 순수하게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학위와 직함은 지식의 증거일 수 있지만, 그것이 곧 인간을 편견 없는 판단자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학계도 결국 사람이 만든 사회이고, 그 안에는 지위, 인정욕구, 학벌, 네트워크, 선후배 관계, 연구비, 출신 학교의 위계가 함께 작동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처음 가진 자본의 격차에서 더 크게 벌어진다. 누군가는 어릴 때부터 영어를 배우고, 해외 논문을 읽고, 좋은 학교와 좋은 연구실을 거쳐 국제 네트워크에 접속한다. 반면 누군가는 뒤늦게 영어 문서와 싸우고, 번역된 파편과 낡은 자료에서 출발한다. 같은 지식을 배우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출발선이 다르다.
한국 학계에서 해외 박사, 특히 미국 박사를 더 높게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와 닿아 있다. 그것은 단순한 사대주의도 맞지만, 미국이 현대 지식 생산의 중심지 중 하나이고, 연구비, 저널, 컨퍼런스, 산업 연결, 실험 장비, 연구 네트워크가 그곳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해외 박사는 단순히 학위를 딴 사람이 아니라, 그 지식 생산 인프라에 접속했던 사람으로 간주되니까다.
문제는 그 접속권이 다시 계층 자산이 된다는 점이다. 해외 유학을 감당할 돈, 영어 교육, 추천서, 연구실 네트워크, 부모의 지원, 실패해도 버틸 수 있는 시간은 모두 불평등하게 분배된다. 그래서 지식은 보편적인 것처럼 말해지지만, 지식에 접근하는 경로는 보편적이지 않다.
결국 학계도 순수한 이성의 시장이 아니다. 그것은 지식, 계급, 언어, 네트워크, 인정욕구가 얽힌 사회적 장이다. 그리고 그 장 안에서 이미 유리한 출발선을 가진 사람은 더 쉽게 더 높은 지식의 입구에 도달한다.
지식뿐만인가? 외모 또한 마찬가지다. 외모가 좋은 사람은 더 빨리 주목받는다. 그리고 심지어 외모는 고칠 수 있다. 부모가 돈이 있는 사람은 더 좋은 장소에서 더 좋은 장비로 더 좋은 이미지를 만든다.이미 인맥이 있는 사람은 더 빨리 확산된다. 결국 스마트폰은 모두에게 같은 앱을 보여주지만, 같은 출발선을 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스마트폰에 더 빠지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그것이 가장 싼 도피처이면서, 동시에 가장 싼 상승 시도이기 때문이다. 학원비는 비싸고, 대학은 비싸고, 좋은 동네는 비싸고, 좋은 관계망은 물려받아야 한다. 하지만 스마트폰은 상대적으로 싸다. 그래서 사람은 그 작은 화면 안에서 계속 시도한다. 배우고, 검색하고, 비교하고, 질투하고, 위로받고, 다시 절망한다.
스마트폰 중독은 쾌락 중독만이 아니다. 그것은 점수판 중독이기도 하고, 입장권 중독이기도 하다. 세상이 무엇을 보상하는지 매일 확인하고, 내가 그 보상 체계에서 어디쯤 있는지 확인하고, 혹시라도 한 번은 알고리즘이 나를 들어 올려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상태다.
이것이 나쁜가? 노동할수록 가난해지기 때문이다. 레버리지가 가능한 소수의 노동을 제외하면, 현대 사회에서 육체노동은 대체로 사람을 더 가난하게 만든다. 임금 상승률이 자본의 팽창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Piketty의 r > g, 즉 자본 수익률이 성장률을 웃돈다는 관찰이 이 직관을 뒷받침한다).
이 상태를 어른들은 흔히 “요즘 애들은 참을성이 없다”고 부른다. 하지만 더 정확히는, 아이들이 참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보이지 않던 비교가 너무 선명해진 것이다. 예전에도 계층은 있었다. 예전에도 외모와 학벌과 돈은 중요했다. 다만 그것이 매일 손바닥 위에서 숫자로 업데이트되지는 않았다.
좋아요 수, 조회 수, 팔로워 수, 학교 이름, 여행지, 옷, 얼굴, 집, 말투, 영어 실력, 취미, 인간관계. 스마트폰은 사회가 보상하는 자원을 끝없이 정량화한다. 그리고 가난한 아이는 그 화면을 통해 매일 배운다.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 나는 무엇이 부족한가. 나는 무엇을 가져야 사랑받고, 선택받고, 올라갈 수 있는가.
그들에게 그것이 유일한 레버리지이기
때문이다. 높은 등록금과 고가치 지식 접근에는 막대한 돈이 든다. 부모의 자산과
네트워크는 학생마다 다른 기회를 준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 전제를 인정하길 거부한다는 것이다
"내가 능력이 부족하니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건 노동의 가치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그리고 그 사회를 만든 것이 자신들이라는 사실조차도 이해하길 거부한다.
즉 자신들이 만든 사회의 문제점이 그저 아랫세대에 발현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워한다.
오늘날 돈을 버는 것은 인기, 외모, 퍼스널 브랜딩이다.
스마트폰은 그것을 보여줄 뿐이다.
이 방향은 데이터로도 확인된다(주로 한국에는 아직 이러한 연구 유형이 적다)
첫째. 저소득 가정의 10대 초반은 부유한 또래보다 하루 약 2시간 더 화면을 본다.2
둘째.스마트폰 의존(집에 초고속 인터넷 없이 스마트폰으로만 인터넷) 비율은 소득에따라 급락한다 — 연 3만 달러 미만 28%, 3만~7만 19%, 7만~10만 9%, 10만 이상 4%.3
셋째.고졸 이하의 24%가 모바일에 인터넷을 의존하는 반면 대졸자는 6%다.3
한쪽에서 시간(관심)이 뽑히는 동안, 세계의 부는 소수에게 더 몰린다.
상위 1%가 세계 부의 약 45%를 소유하고, 최상위 12명의 자산이 인류 하위 절반(약 40억 명)을 합친 것보다 많다.4
3. 그럼 검열 해야하는가?
스마트폰을 검열하거나 제한해도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 .
무균실에 있던 아이가 갑자기 밖에 나온다고 평생 안전할 것인가?
그것이 저항운동의 형태가 되지 않는 한. 이것은 단순히 자본주의의 속성이다.물론 스마트폰은 그 과정을 왜곡하는 능동적 역할을 한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해서 쏟아지는 정보화 시대에 아이가 인터넷을 끊으면 그 인터넷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을 어떻게 분류하는 법을 배우는가?
스마트폰의 왜곡은 근본적 왜곡은 아니다. 세계가 연결될수록 소비 지점은 하나로 수렴한다. 유튜브 같은 플랫폼, 넷플릭스 같은 휴대폰이 그렇다.
그리고 그 단일한 소비지점에서 80억 명이 주의력을 두고 무한 경쟁한다. 물리적 장벽이 없는 세계에서 대중의 주의를 끄는 가장 싸고 확실한 방법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성, 분노, 질투, 과시)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자극의 인플레이션"이 일어난다. 알고리즘이 능동적으로 사람을 타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소비가 단일 지점으로 수렴한 극한 경쟁 환경에서 가장 효율적인 생존 방정식을 찾아낸 것뿐이다.
4. 파괴의 본질
이 파괴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회 불평등이 심각하고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성공으로 가는 유일하게 인지된 경로가 바로 그것들에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능력과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덜 교육 받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가짓 수가 적다.
덜 교육받은 사람일수록 이것은 더 강하게 성립한다. 그들에게 레버리지는 바이럴을 타고 인플루언서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성공이다. 그것을 포기하면 평생 대물림되는 족쇄를 차게된다.

남는 선택지는 보통 둘뿐이다. 주류 가치를 완전히 버리고 자기만의 것을 찾거나, 그 지옥 같은 트랙에 올라타거나.사이버 집창촌에서 호객행위를 하거나.
그래서 도덕적 선택은 생존할 여유가 있을 때만 등장한다.한 번도 가난해본 적 없는 사람은 그들의 절박함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대중은 결코 어리석지 않다. 그저 배우지 못해서 표현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마트폰에 중독된다. 노동을 하면 더 가난해지는 것을 알기에.
즉 사회를 잘 못만든 자들이 왜 그 잘못만든 사회에 적응하려는 자들에게 돌을 던지는 꼴이다. 그렇게 노동이 필요했다면 그들이 노동을 했을때 집을 살 수 있게했다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했다면 적어도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 자신들이 만든 세상에 적응하려는 개체를 비난하는가.

5. 성냥팔이 소녀
가난한 사람에게 스마트폰 집착은 단순한 쾌락 중독이 아니다. 그것은 들어갈 수 없는 따뜻한 방을 창문 너머로 끊임없이 바라보는 일에 가깝다.
스마트폰은 세상이 무엇을 보상하는지 보여준다. 외모, 돈, 학벌, 성적 매력, 팔로워 수, 여행지, 집, 말투, 인간관계. 그 모든 것이 화면 위에서 숫자와 이미지로 정렬된다. 사람은 그 화면을 보며 자신이 어디쯤 서 있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혹시라도 그 안쪽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지 계속 시험한다.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을 켠 것은 어리석어서 였는가? 환상이 현실보다 덜 아팠기 때문이다. 따뜻한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아이에게 성냥불은 거짓된 위로였지만, 동시에 그 순간 버틸 수 있는 유일한 온기였다.
스마트폰도 그런 성냥불에 가깝다. 그것은 현실을 가리는 장치이면서, 동시에 현실을 너무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치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 선택받지 못한 것, 도달하기 어려운 세계를 매일 보여준다. 그런데 바로 그 화면 안에 언젠가 자신도 선택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작은 가능성도 함께 비춘다.
그러니 이것을 쉽게 파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문제는 창문을 바라보는 행위가 아니다. 문제는 방 안에 들어갈 수 없게 만든 구조인 것이다.
스마트폰은 그 창문이다. 그리고 그 창문이 잔인한 이유는, 따뜻한 방의 불빛과 바깥의 추위를 동시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과연 그들의 잘못인가? 성냥팔이 소녀가 추운 바람에 몸을 녹이기 위해 성냥을 켠 것이 과연 그들의 잘못인가?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 소녀를 추위에 내몬 사회야말로 잘못된 것이다.
각주
- Coleman Report / [[Equality of Educational Opportunity]](https://eric.ed.gov/?id=ED012275), 1966 ↩
- Common Sense Media 등 — 저소득 청소년의 스크린 시간이 부유층보다 하루 약 2시간 많음: https://www.commonsensemedia.org/research ↩
- Pew Research Center, "Internet use, smartphone ownership, digital divides in the US"(스마트폰 의존 소득별 격차): https://www.pewresearch.org/short-reads/2026/01/08/internet-use-smartphone-ownership-digital-divides-in-u-s/ ↩
- Oxfam, 2025 불평등 보고서(상위 1% 부 집중): https://www.oxfam.org/en/tags/wealth-inequality ↩